리즈성형칼럼

제목

우리도 이국종 교수처럼

우리도 이국종 교수처럼

 

얼마 전, 판문점 DMZ를 통해 북한군 병사 한 명이 귀순했다. 이 사건은 단순히 북한 병사 한 사람의 귀순으로 시작되었지만, 심한 다발성 총상을 입은 병사의 치료 과정이 공개되면서 우리나라의 외상치료 환경에 대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느닷없이 등장한 기생충 문제가 남과 북 체제의 비교 우위가 언급되는 계기가 되는가 하면, 이것이 공개되는 과정이 환자의 기본권을 침해한 것이 아니냐는 국회의원과 주치 의사 사이의 논쟁으로 번졌고, 이를 언론이 확대재생산하면서 여러 가지 해묵은 이야기들이 수면위로 드러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이 논란이 수습되면서 수면에 드러난 우리의 응급 의료체계 속에 잠복해 있었던 문제들이 국민들과 의사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바로 진료를 하면 할수록 적자가 생길 수밖에 없는 진료환경과 여기에 지원하는 인력들의 근무환경에 관한 문제들이다.

 

복합외상센터, 이곳은 보통 여러 부위에 복합적인 외상을 입은, 생명이 위급해서 신속하고 전문적인 치료가 필수적인 곳이다.

 

생명이 위독한 상태의 다발성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단 1%의 가능성이 있는 치료라도 아낌없이 쏟아 붓는 노력을 해야 한다. 살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치료가 끝나고 회복이 되면 다시 산업현장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료가 끝나고 나면, 의료보험급여를 지불하는 심사평가원의 가차 없는 치료비 삭감이 기다리고 있다. 일반 병원에서 치료하는 기준과 같은 잣대를 놓고 심사하다 보니 치료비의 절반도 제대로 받기 힘들 때도 있다고 한다.

특히 치료중 환자가 사망한 경우는 더 심하다. 어차피 살리기 힘든 환자에게 왜 비싼 처치를 했느냐는 식이다.

 

아주대 병원 외상센터만 해도 1년에 10억 이상의 적자가 난다고 하니 작은 규모의 병원 같았으면 벌써 문을 닫았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빅5 병원은 아무도 외상센터를 운영하지 않는다. 국립 서울대병원 역시 외상센터가 없다. 손해날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인구 천 만의 수도 서울에 중증 외상센터 하나 없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24시간 일을 해야 하는 의료 인력들의 근무환경도 문제다. 피로에 지쳐 있는 이들에게서 위급한 상황에서 정확한 판단과 신속한 진료를 기대할 수는 없다. 적어도 근무시간과 조건이 적절해야 하는데, 이에 대한 보상이 없으니 지원하는 인력도 부족하다. 그래서 여기에 근무하는 주치의들이 몇 년째 집에 가보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낯설지 않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때다. 나에게 언제 어디서든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시작하면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증외상센터는 사회에 필요한 시설이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의료를 담당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나 뿐 만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도 다칠 수 있고, 이들을 치료할 곳이 없어서 병원을 전전하다가 사망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혹은 중증외상센터에서 근무하다가 힘에 부쳐서 그만두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다면, 의외로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병원들이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외상센터를 운영하면서 손해 보지는 않도록 해 주고, 여기에서 근무하는 의료 인력들이 힘들지 않게 하는 제도를 만들 수만 있다면, 여러 산업현장에서 다쳐서 불행한 일을 겪는 가족들이 조금이나마 줄어들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지난 일요일, 눈이 내리는 와중에 의사들이 시위를 했다. 여기에는 나이 많은 의사들보다 젊은 의사들도 많이 있었다. 이들 중에는 나중에 이국종교수처럼 중증외상센터에 일을 하거나 아니면 여기에 일하기를 꿈꾸는 외과의사들, 의과대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들 모두 이국종 교수 같은 의사들이 사회 곳곳에 있기를 바란다. 우리 동네에 있는 내과, 소아과, 이비인후과 의사들이 이 교수처럼 우리 가족에게 헌신적인 의술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 세금과 의료보험료가 앞으로 더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야 할지 고민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흔히 의사들에 관련된 보도들이 나오면 앵무새처럼 언급되는 이야기가 있다. ‘히포크라테스의 선서’, ‘의술은 인술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메아리 없는 울림이 되고 말았다. 현실을 고려한 의료 체제의 변화가 이루어질 때, 진정한 히포크라테스들을 우리 주위에서 보게 될 날이 있지 않을까 한다.

첨부파일 다운로드

등록자관리자

등록일2017-12-13

조회수10,710

  • 페이스북 공유
  • 트위터 공유
  • 인쇄하기
 
스팸방지코드 :